얼마 전 유튜브 박영감 채널에 잠깐 등장했던 1970년대 파타고니아 파일 자켓이 좀 핫(?)했다. 보풀이 잔뜩 일어난 낡은 자켓의 가격이 100만원이 넘을 수도 있다는 사실에 몇몇 사람들은 몹시 화가 난 것처럼 보였다. 그들의 편협한 사고는 차치하고 난 이번 기회에 보풀이 과연 그렇게 나쁜 것일까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어졌다.
보풀의 사전적 정의는 ‘종이나 헝겊 따위의 거죽에 부풀어 일어나는 몹시 가는 털’인데, 여기에는 보풀이 일어나는 원인이 빠져 있다. 보풀은 ‘마찰에 의해 일어나는 사용감’이라고도 말할 수 있는데 사람으로 치면 나이를 먹어감에 따라 생기는 주름이나 흰머리 같은 거라 생각한다. 그럼 자연스레 생기는 주름과 흰머리는 나쁜 것일까? 이건 좋고 나쁨의 기준으로 판단할 수 없는 그저 발생할 수 밖에 없는 현상을 어떻게 받아들이느냐 즉, 관점의 차이가 아닐까.
옷도 사람처럼 시간 앞에 순응할 수 밖에 없다. 착용하는 빈도에 따라 차이는 있겠지만 사용감이 필연적으로 발생하는데 부드러운 소재는 보풀로, 가죽이나 페이턴트 같은 소재는 갈라짐으로 나타나며 진했던 색감의 옷이 파스텔톤으로 변하기도 한다. 이런 변화를 어떤 이들은 시간이 만들어낸 디자인으로 여겨 더욱 애정하게 되고 어떤 이들은 이젠 못 쓰게 됐다며 버리기도 할 것이다.
이탈리아 카센티노 지역에서는 지역명을 딴 ‘카센티노’라는 고가의 울 소재를 생산하는데, 이는 우리가 알고 있는 ‘보풀’을 인위적으로 원단 표면에 일으켜 보온성과 발수성을 높인 원단이다. F/W 시즌의 피티워모 스트릿 스냅에는 이 카센티노 울로 만든 코트를 차려입은 멋쟁이들이 자주 보인다.
이처럼 ‘보풀’은 관점에 따라 시간을 머금은 아름다운 디테일로 여겨질 수도 있고 필요에 의해 인위적으로 만들 수도 있으며 누군가에게는 그저 제거해야 할 사용감으로 여겨질 수도 있다. 백발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여 근사한 분위기를 자아내는 이도 있고 흑발로 염색해 보다 젊어 보이길 희망하는 사람도 있는 것처럼.
내게도 그런 물건이 있다. 회사를 다니던 시절 마음 맞는 동료들끼리 떠난 출장길에서 우연히 머물게 된 숙소 주인분이 선뜻 내어주신 산울림의 11집 LP판이다. 음악이 나오는 동안 ‘따닥 딱’, ‘치직치직’ 잡음이 끊이지 않고 계속 들리는 LP판이다. 처음에는 기대한 만큼 판의 상태가 좋지 못해 실망스러웠지만, 언제부터 이 잡음이 동료들과 함께 피운 그날 밤의 모닥불 소리로 들린다.
옷은 디지털이 아니다. 아날로그다. 오류가 뜨는 게 아니다. 몸과 함께 시간을 머금고 서서히 변화하는 것 뿐이다. 물건을 사용하는 순간 처음 상태로 돌아갈 순 없다. 잡음처럼, 보풀처럼, 시간의 징표를 얻는다. 인간도 마찬가지다. 그 시간 안에서 근사하게 변화하기를, 멋진 옷을 입는 사람이 아닌 멋진 사람이 되어 옷을 입기를 소망할 뿐이다.